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난의 행군 (문단 편집) == 설명 == >1995년 봄. [[평양시|평양]]의 공기는 음산했다. > >2월경부터 쌀값이 미치기 시작했다. 1kg에 50원 정도였는데 자고 나면 올라 석 달쯤 뒤엔 230원까지 치솟았다. > >120원쯤 됐을 때 사람들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며 술렁거렸다. 200원이 넘었을 때 거리는 축 늘어져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넘쳤다. > >식인 사건 등 범죄 소식이 퍼지며 도시 분위기는 불과 몇달 만에 흉흉하게 변했다. > >난 1994년 12월 말 기차역에서 만난 [[평북]] [[구성시|구성]]의 여인에게서 대량 아사 소식을 처음 들었다. > >군수공장이 밀집한 그곳 로동자구(區)에선 여름부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가을쯤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평양에서 불과 100여km 떨어진 곳에서 그런 참사가 벌어지는 줄 몰랐다. 그때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 >몇 달 뒤 굶주림은 평양까지 순식간에 삼켰다.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외부에서는 1995∼1998년으로 보지만, 실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 >아사자 수는 300만 명이라 알려졌지만 난 100만 명 미만으로 추산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을 정도면 어림잡아 1000만 명은 심각한 신체·정신적 장애를 겪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하 생략) >---- >-[[주성하]] 기자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3098204|회고]].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BBS_201303070458353660.jpg]] >----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30308&parent_no=4&bbs_id=BBSMSTR_000000000004|국방일보]]에 나온 기사의 그림.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이애란(요리연구가)|이애란]] 씨가 탈북 후 [[대한민국|한국]]의 한 고급식당에서 나온 통[[감자]]를 보자 북한에서 먹던 통감자가 생각나, 그때의 [[트라우마]]로 감자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한 탈북자는 질긴 고기라도 맛있다며 남한 와서 고맙게 여기고 먹는다고 지인들에게 밝힌 바 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정말로 썩은 고기라도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질긴 고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시절 지옥을 겪어본 탈북자 증언을 보면 그야말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먹었다는 증언들이 나온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일부 탈북자들은 과수원에서, 농촌 일손 돕기 도중, 심지어 가로수에 열린 열매만 봐도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탈북자들이 통분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음식물 쓰레기인데 이구동성으로 "북한에는 이런 음식 먹고 싶어도 못먹는데 이걸 이리도 버리다니..."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 북한의 뒷배와 지원을 해주던 소련의 붕괴와 김일성의 실책에 가까운 3개의 대사업으로 곳간이 텅텅비어서 서서히 세가 기울어가던 [[북한]]이 완전히 재기불능의 수준으로 망가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라는 표현은 원래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쫓겨 다니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던 시기[* 다만 교차검증되는 자료에 의하면 그때가 김일성이 힘들게 살던 시절이 맞긴 하다. 과대포장된 면이 있기는 하나 어쨌든 간에 독립운동이든 마적질이든 자칫하면 일제에 잡히거나 밀정의 배신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꽤나 험난한 삶을 살았다.]와 1956년에 있었던 [[8월 종파사건]]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북한의 경제난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현재에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격전을 1차 고난의 행군, 8월 종파 사건을 2차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한국과 달리 경공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냅다 중공업 우선 경제정책을 폈으나 정작 첨단 제품을 생산하기엔 기술 수준이 모자라 수입에 의존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후반 들어서 동구권 붕괴 및 소련 해체와 함께 북한 경제도 이미 쇠락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구권과 소련은 북한에게 무상지원과 물물교환 형태의 유상지원으로 북한에게 석유와 기계제품 같은 국가유지에 필수적인 제품을 지원했는데 동구 공산정권과 소련 해체 후에 같은 사회주의 동맹이란 울타리가 없어지고 소련이 붕괴하고 탄생한 러시아는 제 코가 석자인 마당에 외화가 부족하여 한국에서는 불곰사업을 통해 빚을 일부 탕감받기도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존 외상금도 떼먹은 북한에 달러 현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자원과 제품과 부품 공급이 끊겼고 이후로 추락이 시작되어서 1990년대 중반 필수적인 유지관리도 못하니 전력 철도 제철 기계 비료 화학 산업이 연쇄붕괴하며 경제가 나락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1990년대 후반 중국산으로 교체하며 어느정도 극복한다.]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북한이 전쟁 이후 초반이라면 몰라도 서서히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남한은 경공업을 하면서 산업기반이 쌓이고 기술력도 쌓이자 박정희 정부부터 대대적으로 중공업을 시작하였고[* 사실 [[경공업]]에서 시작하여 [[중공업]]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정석이다. 물론 [[중공업]]이야말로 공업의 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경공업의 기반이 없이 중공업부터 무작정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소련]]이 [[반면교사|잘 보여줬다.]] 경공업이 소비재 중심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소비재]]야말로 [[의식주|대중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경공업으로 경험치를 쌓고 기술력을 확보한 다음 중공업을 도입하는 편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에 훨씬 유리하다.] 이후 베트남 전쟁을 통한 외화벌이 및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으며 이 자본을 기반으로 [[한강의 기적]]을 통해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뤄낸데다, 전두환 정부부터 준비해 노태우 정부가 개최한 [[1988 서울 올림픽]]이 서구권 동구권이 전부 참여하는 대박을 친다. 반대로 북한이 자랑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삽질과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에 망하면서 [[임수경 방북 사건]]을 통해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인민들한테도 알려지는 등 그야말로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남한에 패배했다는 것이 가시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1987년부터 그토록 추진했던 제3차 7개년계획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북한측은 이를 타개하고자 1992년 라진-선봉 무역지대를 만들며 외국인기업법 등 3개 법률을 제정해 제한적 개방을 시도했고, 1994년 완충기 설정 후 경공업과 농업, 무역업을 키우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특히 농업은 농업의 ㄴ자도 모르는 김일성이 주도로 만든 [[주체농법]]은 소련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대량의 비료가 필수요건이었는데 소련이 망하고 나서 지원이 없어지자 주체농법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토지는 황폐해졌다. 그러나 [[북한/경제/역사#s-6|이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배급제도는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급으로 일단 굶어죽지는 않았다. 1980년대부터 산업생산이 한계에 접어들고 농촌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보였지만[* 산골지역 자강도, 량강도, 함경도 지역은 1991년부터 보릿고개가 길어지고 작확량이 눈에 띄게 주는등 위기가 미리 찾아왔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이전인 [[1993년]]경까지만해도 부족하지만 배급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으며 국가도 정상적으로 운영되는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을 숨길 수 없는 [[1994년]] 이후의 북한과는 달리, [[1993년]]까지는 적어도 외신에 소개되는 평양의 모습은 그럭저럭 한나라의 수도 수준은 갖추었었다.[* 당연히 지방이나 못 사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말 그대로 북한의 사회 체계와 국가 기간 산업전반을 붕괴시켜 버렸고,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김정일은 텃밭에서 자란 작물 소유권을 인정해주다보니 1980년대 말까지 주로 신선식품류나 쓰다남은 잡화물을 거래하거나, 아니면 [[8.3 인민소비품]]같은 부업벌이를 하거나 여러 [[길거리 음식]]을 사먹는 요식거리하는 곳으로 여겨지던 [[장마당]]은 식량을 살 수 있는 시장으로써 역할과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급속한 물가상승과 배급중단으로 인해 기본 월급으로 도저히 먹고살지 못하게 되면서 대다수 주민들은 장마당에서의 부업벌이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고, 국영기업들도 장마당을 통해 모자른 자재를 공급받고 장마당에서의 돈벌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 1980년대부터 뿌리내리던 시장경제가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마당을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김정은이 화폐개혁을 진행하면서 때려잡게 된다.] 이는 [[북한이탈주민|탈북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결과와 꽃제비라는 부랑아들을 낳음과 동시에 [[조선로동당|당]]과 [[김정일|수령]]에 대한 실망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본격적으로 경제적인 의미의 계층 분화[* 그 이전에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누어지기는 했지만, 이건 정치적인 의미의 계층을 나눈 것이었다.], 이전에도 평양시내 당간부와 농촌지역 사민들의 생활수준 차이는 극과극이었지만 이제는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화교]]와 [[재일교포]], [[탈북자]]의 가족의 지위도 급속히 상승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도입이 원활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화교들이 북한 경제의 실세이며 [[돈주]]들이다. 성인 화교는 한달에 한번 고향에 있는 친척을 방문할 권리가 있는데 이를 기회로 트럭 한대씩 분량을 몰고와서 장마당에 물건을 공급하는 북한당국도 해결 못하는 경제에 거의 필수적인 무역회사 역할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